(가) “자아, 동생, 이거 우리 오늘이 력사적인 형제 상봉의 날이 아니웨까. 한잔 쭉 들이키자우요.” “아이고, 형님 말씀 놓으십쇼.” 그날은 아저씨의 연변 이야기, 아니 랴오닝 성 이 야기, 큰할아버지 이야기, 아저씨의 중국 생활 이야 기, 아저씨의 외갓집 이야기, 이북에 살고 있다는 아저씨의 외삼촌 이야기, 아저씨가 한국에 들어와 산 이야기를 듣느라 온 식구가 꼼짝도 못하고 지나 가 버렸다. 아저씨는 말하자면 한국에 돈을 벌러 온 ‘조선족’이주 노동자인 것이다.
(나)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침에 일어나 아버지가 평 소에 우사 입구에 걸어 놓는 아버지의 작업복을 입 고서 우사로 가더니 소먹이를 준다, 바닥을 청소한 다, 과수원에 거름을 낸다, 분주하게 돌아치는 것이 었다. 그리고 다음 날도, 그다음 날도 아저씨는 아 버지를 따라다니며 혹은 혼자서 마치 우리 집 일꾼 으로 들어온 사람처럼 구는 것이었다. 밥때가 되면, 마당을 들어서며 “제수씨 밥 안 줍네까? 뱃가죽이 아주 등가죽에 가 붙었습네다.”라고 우렁우렁하게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.
(다) “엄마, 저 아저씨 언제 간대요?” “낸들 아니?” 그러고 보니 엄마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. 엄마를 답답하게 하는 것은 사실 내가 느끼 는 답답함보다도 더 심각한 것이었다. “원, 아무리 일가래도 저건 몰상식이야.” “맞아, 몰상식.” “아무리 일가래도 엄연히 손님으로 와 놓구선 날 마다 술을 달래지 않나, 옷을 빨아 달래지 않나.” “맞아, 아무리 일가래도.”
(라) “여보, 뭐해. 술 내오잖고.” 아버지는 사실 술도 못 마시면서 순전히 아저씨 때문에 술을 가지러 온 것이다. “당신 아들 좀 보소. 여자애한테서 온 편지 찾는 다고 눈에 불이 붙었소.” “아, 드디어 편지가 오긴 왔구나. 축하한다야.” “편지가 오면 뭐해요. 엄마가 뺏어 가서 돌려주지 않는걸.” “뭐야? 여보, 당신 왜 그래? 창이한테 온 편지를 왜 당신이 가져?” “그걸 몰라서 물어요? 지금 쟤 나이가 몇 살이야? 이제 겨우 열여섯 살짜리한테 무슨 놈의 연애편지 야? 딱 사 년만 참아라. 스무 살만 되면 그때부터는 연애편지가 아니라, 누구하고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, 내가 간섭하지 않을 테니.” “여보, 당신 이제 보니 참 야만인이군그래. 아니, 어떻게 자식한테 온 편지를 갈취해?” “가, 갈취? 당신 지금 나보고 갈취했다고 했어요?” “그럼 그것이 갈취한 것이 아니고 뭐야?”
(마) 나는 알고 있었다. 사실 엄마, 아버지가 저렇게 대립할 수밖에 없는 밑바닥 감정에는 분명 아저씨 의 존재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. 그러나 엄마도, 아버지도 아저씨에 대한 말은 입 끝에도 올리지 않 았다. 그 이유는 아저씨가 바로 지척에 있는 우사에 서 거름을 내는 척하면서 집 안의 상황에 낱낱이 귀를 기울이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. (바) 그때, 일가라는 사람이 있었지. 중국에서 온 아 저씨, 나의 당숙. 나는 왜 그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일까. 그러나 나는 맹세코 아저씨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. 내가 아저씨를 잊었다면 지금 이 순간 왜 그를 생각하고 눈물이 난단 말인가.
아침에 밥을 먹으면서 나는 아버지한테 물었다. “아버지, 일가라는 분요.” “누구?” “아니, 아버지도 잊으셨어요?” “아, 그 형님 말이야?” “네. 지금도 연락하시나요?” “글쎄다. 워낙에 형님들이 많아서 말이지.” “그런데, 아버지, 정말 그분이 아버지 사촌 형님 이 맞아요?” “이 세상에 사촌 아닌 사람이 어디 있니?”
- 공선옥, ‘일가’